선이 말하는, 색이 침묵하는 - 밀로와 아르퉁 사이에서

내가 호안 미로에게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선, 그 색, 그 배치.
볼 때마다 마음의 어딘가가 '풀려버린다'.

언어가 되기 전의 감정.
기억에 닿기 전의 풍경.
미로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원풍경이 떠오른다.

어딘가 어린아이의 낙서 같으면서도
우주적이고, 음악적이고, 시적이고, 초월 적이다.


미로 ─ 색채의 시, 감각의 원문

미로는 '선의 화가'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선은 '형태'가 아닌 '노래'처럼 존재한다.

거기에는 규칙도, 논리도 없이
그저 춤추고 있다.
웃고 있다. 자고 있다. 깨어있다.

미로는 '색채가'이다.
그것은 '색을 사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색을 '숨 쉬게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빨강, 파랑, 노랑, 검정.
그것들이 그저 존재함으로써 '공간'이 열리게 된다.
그려진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서 만들어지는 '기척'이 미로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미로를 넘어설 수 없다.
그의 작품은 이미 완성된 우주이며,
우리가 들어가는 여백마저도 아름다움으로 편입되어 버렸다.

그것은 경외심이자 일종의 절망이기도 하다.
'더 이상 이 영역은 아무도 닿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독한 거장의 고독.


알툰 - 구조의 선, 현실의 파편

한편, 한스 아르퉁.
그의 작품을 보고 느끼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이다.

그 선에는 '이렇게 있고 싶다'는 의지가 있다.
건설적이고, 반복적이고, 실험적이다.
감정에 빠지지 않고 현실 속에서 선을 긋는 듯한 긴장감이 있다.

알툰의 선은 '그림의 지층'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만지고 난 후의 손길처럼 느껴진다.
우연이 아니라 결단력 위에 세워진 것이다.

미로가 '꿈'이라면
알툰은 '기록'이다.
미로가 '내면의 우주'라면
알툰은 '외부 세계와의 접촉 흔적'이다.

그리고 나는 그 현실의 '마모'에서 왠지 모를 미래를 느낀다.
알툰에는 아직 사용되지 않은 여백이 있다.

그는 소비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파헤쳐질 자원 같은 예감이 든다.


나 자신 - 감정의 원점과 구조의 미래 사이에서

미로는 **내 가장 깊은 감각의 '원점'**에 있다.
언어 이전의 기억, 움직임 이전의 신체,
시선 이전의 '세계 그 자체'를 그는 그려내고 있다.

알퉁은 **내가 앞으로 나아갈 '방법론'**의 끝에 있다.
선을 갈고, 구조를 견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믿는다.

이 두 사람은 모순된 관계일까?
아마 아니겠지.

오히려 나는 이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다.

  • 원초적 감각과 함께,
  • 차분한 구성과 함께,
  • 순수한 시정과 함께,
  • 현실의 마모와 함께,

그 모든 것을 두 팔에 안고, 지금 내 선을 긋고 있다 .


매듭 - 선은 몸 안에 있다.

무심탈력™이라는 방법론은
말보다, 동작보다,
"선을 그리는 몸"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은 감정의 궤적이고, 구조 속에서 흔들리는 희망이며,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숨 쉬는 선이다.

미로와 알통의 선은
지금 내 몸 안에서 겹쳐져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