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과 구조 사이에서 - 폰타나와 스텔라를 바라보는 신체의 위치에서 바라보기

예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종종 '호불호'나 '이해 여부'로 평가하려 한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거부할 수 없이 흔들리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이성을 넘어선 불쾌함도, 경외심도 아니다.
좀 더 육체적이고, 좀 더 원초적인 - '만지면 깨질 것 같은 것'을 만진 느낌.

프랭크 스텔라와 루치오 폰타나.
이 두 사람의 작품을 앞에 두면 항상 몸이 들썩인다.


폰타나 - 균열로서의 희망, 그러나 낡은 풍경

폰타나의 '콘체티 스페이셔리'.
잘려진 캔버스.
그곳에 깃든 것은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반항이자 기도이기도 하다.

나는 거기서 호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 틈새는 분명히 '질문'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이 아닌 개방.
파괴가 아니라 도선.

하지만 가끔은 그 질문조차도 형식화된 과거로서 내 안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순간이 있다.
자른다는 행위가 현대의 신체에는 더 이상 '무게'를 지니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

질문은 아름답다. 하지만 질문도 때로는 늙어간다.


스텔라──구조의 압력, 이해를 거부하는 숭고함

반면 스텔라는 나에게 호감조차 주지 않는다.
하지만 거부감 없이 "보고 만다".
검은색의 반복, 구조의 침묵, 의미의 말소.
거기에는 내 안의 '해석의 습성'이 전혀 통하지 않는 벽과 같은 존재감이 있다.

그 벽은 나에게 **"생리적 올바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
즉, '좋아한다, 이해한다, 납득이 간다'는 안도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불편하고, 동시에 눈을 돌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의미 없는 질서'가 있고,
'의도를 거부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을 거부하는 구조 그 자체인 것 같고 -
그리고 나는 그런 구조를 어딘가에서 동경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내 몸은 어디에 서 있는가

이 두 사람 앞에서 나는 감성이 아니라 '태도'를 묻는 것 같다.

폰타나는 "계속 질문하라"고 말한다.
스텔라는 '묻지 말고, 있으라'고 말한다.

전자는 친밀하고 인간적이다.
후자는 차갑고 우주적이다.
그래서 나는 폰타나에게 '공감'을, 스텔라에게 '복종과 같은 긴장감'을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두 내 안의 '무심탈력(武心脫力)™'의 뿌리를 건드리는 것이다.
질문을 여는 힘과 구조 속에서 침묵하는 힘.
둘 다 몸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무심탈력™의 존재방식은 균열도 구조도 아니다.

무심탈력™이란
'찢는 것'도 '구조화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질문이 지나간 뒤의 침묵 속에서 일어나는 '호흡'과 같은 존재 방식이다.

  • 구조에 균열이 느껴진다.
  • 틈새에 축을 세우다.

그 틈새에서
내 메소드가 싹을 틔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치를 넘어선 '존재 방식' 그 자체다.
질문을 품고, 질문을 내려놓고,
그냥 조용히 서 있다. 숨을 쉰다.


결론 - 스텔라와 폰타나의 '사이'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지금도 폰타나에 친근감을 느끼고, 스텔라에 무시할 수 없는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아닌,
그 '균열과 구조의 틈새'에 조용히 서고 싶다.

바로 그 자리에
무심탈력™이,
그리고 나라는 말 못하는 존재가,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